파블로 피카소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현대 미술 작가다. 그는 92세라는 나이로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쳤지만 생전에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조르주 브라크(1882-1963)와 함께한 '입체주의'의 탄생은 인류 조형의 역사에서 일대 혁명적 사건으로 기억되며, 피카소는 브라크와 더불어 그 ‘혁명’의 리더로 기록되어 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던 1937년 4월 26일,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담은 그림이다.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좌파 인민전선을 소비에트 연방이, 우파 프랑코파를 나치와 이탈리아가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개된 것으로, 1939년 프랑코파의 승리로 종전될 때까지 스페인 전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때 바스크 족의 수도인 게르니카가 나치에 폭격당하면서 15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피카소가 분노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전투로 인해 군인들이 아니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점. 그는 폭격이 보도된 후 바로 《게르니카》 작업에 들어가 5월 1일 이를 위한 첫 스케치를 내놓는다. 《아비뇽의 처녀들》과 함께 피카소의 2대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게르니카》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 사실 피카소는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들어갈 작품을 의뢰받은 상태였다. 피카소는 이를 위해 파리 그랑 오귀스탱 가에 작업실을 얻어 세로 349.3cm, 가로 776.6cm의 대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게르니카》에서는 나치의 폭격이나 내전의 구체적인 참상과 그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정형적이지 않은 인물과 대상의 표현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작품을 이루는 각 요소들의 조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의 흑백 톤의 컬러만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극대화되었다. 캔버스 왼쪽부터 보면 불이 난 집, 죽은 아이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멍한 황소의 머리, 부러진 칼을 쥐고 쓰러진 병사, 광기에 울부짖는 말, 상처 입은 말, 램프를 들고 쳐다보는 여인, 여자들의 절규, 분해된 시신 등등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뒤엉켜있다.
출처: 월간미술
당시 공산당 활동을 하던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들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가 전쟁화보와 함께 전쟁의 전개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함으로써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식하였으며 그에 부응해 반전평화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발로리스에 체류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으로 '뤼마니테'가 전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를 참고하며 1950년 9월부터 제작에 착수, 1951년 1월 18일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미군이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의 좌익이나 진보운동진영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문가인 박명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반공우익 민간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북한군이 황해도에서 퇴각하면서 우익민간인 400여 명을 살해하자 한국군의 북진에 앞서 광복동지회를 결성한 신천 지역 우익인사들이 10월 13일 봉기를 결행, 공산정권에 부역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숙청한 결과 600여 명의 좌익인사들이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결국 신천학살은 우익들의 반공 봉기과정에서 빚어진 좌우익의 상호 살육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천학살은 피카소가 그림을 구상한 이후에 일어났으며 더욱이 신천학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신천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피카소는 '뤼마니테'가 전하는 기사에 의존하여 한국전쟁을 상상했고,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반전평화사상에 따라 이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마치 기계처럼 무자비한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과 그 앞에선 희생자를 대비시킨 작품의 구도와 형식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점령군에 맞선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들의 저항을 잔혹하게 보복한 현장을 그린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네의 '맥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으로부터 빌려온 것으로써 피카소는 그것을 입체주의와 자신이 1920년대부터 추구했던 신고전주의 방식으로 번안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발표되자 미군 당국은 즉각 학살 연루를 부정했으며, 프랑스공산당조차도 이 그림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전쟁에 대해 반대한다는 메시지와 보편적인 휴머니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게르니카'가 바스크인들이 사는 도시에 대한 융단폭격의 참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을 도덕의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는 피카소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학살'이 1951년 '살롱드메'에 출품됐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미술계는 혼란과 당혹에 빠졌습니다. 특히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피카소가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책동에 동원된 위험인물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심지어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25년간 그를 사찰했습니다. 이 작품이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란한 미술가들에게 알려지면서 피카소는 한국에서도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김병기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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